제 목 : 헨델의 일생 | 조회수 : 66861 |
작성자 : 김국호 | 작성일 : 2001-03-01 |
헨델의 일생
Georg Friedrich Handel (1685 할레-1759 런던) 1726년 영국으로 귀화한 독일의 작곡가.
외과의사 겸 이발사였던 게오르그 헨델 Georg H.(1622~97)과 1683년에 재혼한 도로테아 타우스트 Dorothea Taust(1651~1730) 사이에서 태어난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은 일찍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보였는데 그것을 간파한 것은 어머니와 숙모뿐이었다. 아들을 법률가로 키우기로 한, 완고하고 엄격한 아버지는 1692년경 작센공이, 1696년에는 베를린에서 만난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1세가 아들의 음악교육을 돕겠다고 했을 때 이것을 단호히 사양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을 차하우에게 맡기는 데는 동의하게 된다. 차하우는 할레의 뛰어난 음악가로서 헨델에게 푸가, 대위법, 작곡 및 많은 악기(쳄발로, 오르간, 바이올린, 오보에, 그리고 첼로)의 연주방법을 가르쳤다. 차하우는 특히 동시대의 독일과 이탈리아의 작곡가에 대해서 가르치려 했다(프로베르거, 케를, 볼프강 에브너 Wolfgang Ebner, 알베르티, 니콜라우스 아담 슈트룽크 Nicolaus Adam Strungk, 크리거 등).
당시의 음악계와의 다양한 접촉
헨델은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고 어머니를 만족시키기 위하여(헨델의 중요한 두 가지 성격) 중학교, 고등학교 공부를 하고 1702년 3월, 할레 대성당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으나 보다 넓은 활동을 하기 위해 1903년부터 하기로 한 계약을 취소하고 함부르크로 갔다. 마테존은 그를 시 당국의 음악계나 지식계급의 사람들, 가령 영국 영사의 저택이나 그가 오르간을 담당하게 될 성 마리아 막달레나 교회, 그리고 특히 오페라 극장의 오케스트라에 소개해 주었다. 오페라 극장에서 바이올린 주자 및 쳄발로 주자로 활약한 후, 그는 종종 게오르그 뵘이나 마테존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요한 수난곡(1704년 사순절)과 1705년 1월 8일의 초연에서 대성공을 거둔 최초의 오페라 알미라, 이어서 네로(1705. 2. 25)를 작곡했다. 네로에 실패하고 함부르크의 음악적 상황(특히 오페라 극장 지배인 크리거의 위장 도산)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그는 메디치가의 조반니 가스토네의 초청으로 1706년 10월 피렌체로 갔다. 이어서 1707년 1월 초에는 로마로 가서 학술 후원자들(팜필리 추기경, 오토보니 추기경)과 음악가들(코렐리,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 및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파스쿠이니, 마르첼로)이 모이는 아카데미아 다르카디아와 관계를 가졌다. 이 시기에는 많은 종교곡(뛰어난 주님은 말씀하셨도다[1707])과 세속음악(이탈리아어로 된 감탄할 만한 칸타타)이 작곡되었고, 헨델이 선율 작곡가로서의 모든 재능을 전개시킨 이러한 작품들은 헨델에게 필요한 형식을 보다 훌륭하게 통제하기 위한 시작(試作)이 되었다. 오페라 로드리고는 1708년 피렌체에서 초연되었으며, 그 후 헨델은 나폴리로 가서 칸타타 아치스, 갈라테아, 그리고 폴리페모와 새로운 오페라 아그리피나를 작곡했다. 이 오페라는 베네치아에서 초연(1709년 12월 26일)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오히려 신중해진 헨델은 하노버 선거 후의 궁정 악장직을 수락하기로 한다(1710년 6월1712년 가을). 그러나 동시에 런던에도 여행하게 되어(1710년 12월1711년 6월) 이곳에서는 리날도가 대성공을 거두었다. 하노버에서 자기의 작품을 상연할 수 없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하여 영국과의 접촉을 계속해 온 헨델은 1712년 11월 다시 런던으로 돌아갔다(시인 휴즈 Hughes와 함께).
새로운 조국, 영국
헨델은 우선 벌링턴 백작의 저택에 머물면서 알렉산더 포프 Alexander Pope, 게이 Gay, 조나단 스위프트 Jonathan Swift, 존 아버스놋 John Arbuthnot, 그리고 페푸슈 등과 교우 관계를 돈독히 했다. 그리고 몇 개의 세속곡(충실한 양치기, 테세오 등)을 작곡하고 이로 인해 궁정의 공식 작곡가가 되었다. 앤 여왕 탄생일을 위한 오드(1713년 2월)를 발표한 후, 공식적인 곡이 되는 유트레히트 테 데움과 유빌라테(1713. 3), 이어서 하노버 선제후가 1714년 6월, 영국의 국왕이 되었을 때 또 다른 테 데움 D장조를 작곡했다. 그리고 우다르 드 라 모트의 대본에 의한 새로운 오페라 아마디지를 작곡했다. 헨델은 주군(主君)이 하노버에 부임함에 따라 1716년 여름 독일로 돌아가서 브로케스 Berthold Heinrich Brockes의 시에 의한 수난곡을 작곡(이 시는 카이저, 텔레만, 마테존, J. S. 바흐도 사용하고 있다)하여 1717년과 1719년의 사순절 때 함부르크에서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연주를 듣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1716년 12월 말부터 다시 런던에 체류하면서 1717년 여름에는 찬도스 공작에게 초빙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국왕을 위하여 유명한 수상음악(초연 1717년 7월)을 작곡한 후 공작의 예배당을 위하여 찬도스 앤덤을 작곡했다. 이것은 영어 가사에 의한 시편곡이며 이탈리아어 칸타타와 그의 오페라 작품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미래의 오라토리오를 위한 연습과 같은 것이었다. 그 당시 헨델은 하만과 모르데카이 Haman and Mordecai(1720, 에스테르 제1고)가 성공한 후에도 오라토리오를 창작하려고 생각지도 않았다.
아카데미의 설립:기쁨과 실망
주로 오페라에 심취하여 극장음악에 열중하고 있던 헨델은 한 가지 어려운 사업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것은 아카데미의 설립이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주식회사로 국왕의 비호를 받고 있었으며(그래서 왕립 아카데미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오페라를 상연하는 것이 그 임무였다. 그때부터 헨델의 인생은 오페라의 보급, 근대화와 조정에 연루된 성공과 실패와의 싸움의 역사가 되었으며, 때로는 세론(世論)에 저항하면서까지 천부적인 묘사력을 가진 어법으로, 음악이 예외적 상황에 놓인 예외적인 등장인물에 의해서 살아 있는 드라마를 표현하는 종합작품을 만들었다. 아카데미 제1기(1720~27)는 5막의 희비극처럼 전개되었다. 제1막(1720~22). 승리감이 넘치는 개막(라다미스토[1720. 4]) 후, 헨델은 보논치니나 그의 옹호자(벌링턴 백작 및 왕립 아카데미의 운영위원회)와도 대립하게 된다. 제2막(1722). 보논치니파는 그리젤다 Griselda로 승리를 거둔다. 제3막(1723). 헨델은 오토네로 기세를 만회하고 플루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집 op. 1 및 op. 2를 출판하고, 8개의 하프시코드 모음곡집(제1권, 1720)에서 거둔 승리를 다시 맛보게 된다. 제4막(1724~25). 세 작품(줄리어스 시저와 타메를라노[1724], 로델린다[1725])의 히트로 잃었던 지위를 회복하고, 보논치니는 패배했다. 제5막(1726~28). 시피오네, 알레산드로, 아드메토로 헨델의 명성은 확립되었으나 음모와 재정 압박, 온갖 질투, 특히 인기 소프라노 가수 보르도니와 쿠초니와의 싸움은 1727년 6월 황태자의 면전에서까지 벌어졌으며, 이런 이유로 해서 왕립 아카데미는 붕괴되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스캔들도 리처드 1세(1727. 11) 및 시로에(1728. 2)의 초연과 그 성공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관리와 궁정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종전의 운영위원회를 떠나서 헨델과 그의 협력자 하이데거 Heidegger만의 지도에 의한 신(新)아카데미(1729~33)는 새로운 가수를 채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구(舊)아카데미에서와 같은 부침을 겪게 된다. 헨델은 가수를 물색하기 위하여 1728년 3월부터 5월에 걸쳐서 이탈리아로, 그리고 6월부터 7월 사이에는 독일로 갔고, 앞을 못보게 된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만난다. 그러나 J. S. 바흐의 초대에 응하여 라이프찌히로 가지는 못했다. 1729년 12월부터 1732년 2월 사이에 그는 로타리오, 걸작 파르테노페, 포로(1731), 에치오(1732. 1), 소자르메(1732. 2)의 초연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국왕의 지원과 보조금(1000파운드) 그리고 성공작의 재상연에도 불구하고(특히 줄리어스 시저), 헨델은 아카데미 조직의 존속을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732년 하론 힐 Haron Hill의 권유로 작곡한 영어 텍스트에 의한 오라토리오 에스터의 성공이 헨델로 하여금 오페라를 포기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의 눈에는 퇴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1733년 1월의 오를란도의 성공은 그의 이러한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청중은 영어 텍스트에 기초한 오라토리오 데보라를 옥스퍼드에서 초연된 아탈리아와 마찬가지로 환영했다. 기호, 자존심, 정복욕 때문에 헨델은 오페라를 계속 써서, 영국 황태자의 후원으로 설립되어 핫세나 포르포라를 후원하는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라이벌 조직 X귀족 오페라 Nobility Opera와 대항하게 된다. 투쟁은 잠시도 끊일 날이 없었고 음모(하이데거의 계약 취소로 헨델은 코벤트 가든의 존 리치 John Rich의 휘하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와 실패, 또는 승리(아리안나[1734. 1], 파르나소 산의 제전[1734. 3], 아리오단테[1735. 1], 알치나 Alcina[1735. 4])가 끝도 없이 되풀이되었다.
오페라에서 오라토리오로
이러한 끊임없는 투쟁과 작곡가, 지휘자, 흥행주로서의 일에 지쳐버린 헨델은 1735년 여름 턴브리지 웰즈의 온천지로 가서 다음 시즌을 위하여 준비를 하고(알렉산더의 향연), 1736년 여름에는 주스티노, 아르미니오, 베레니체, 버려진 디도네 Didone abbandonata를 작곡했다. 그러나 그는 1737년 4월 13일에 행해진 이들 작품의 초연에 참여할 수 없었다. 초연이 있기 몇 시간 전에 발작을 일으켜(뇌출혈? 또는 뇌일혈?) 반신불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카데미보다 4일 전인 6월 11일 귀족 오페라는 폐쇄되고 말았다. 만일 헨델이 자신의 라이벌 조직을 파멸로 이끌었다면 그 또한 무기력하게 되었을 것이다. 헨델은 결국 엑스 라 샤펠의 온천지로 가는 데 동의하게 된다(1737. 9). 그는 기적적인 치료법으로 곧 회복되었고, 10월 28일 런던 데일리 포스트지는 그의 귀환을 보도했다. 헨델은 곧 새로운 오페라 파라몬도(캐롤라인 왕비의 서거로 초연이 연기되었으나 그때 왕비를 위하여 걸작 장송 앤덤이 작곡되었다)와 1738년 4월 세르세를 작곡하는 한편, 월쉬 Walsh 출판사에서 op. 4(오르간을 위한 6개의 콘체르토)와 op. 5(2대의 바이올린, 또는 플루트를 위한 3중주 형식의 7개의 소나타)가 출판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무렵부터 헨델은 오페라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일까?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은 헨델은 그 무렵 이메네오(1740. 11), 이어서 데이다미아(1741. 1)를 발표했다. 형식이나 이탈리아어 대본, 나아가서는 오페라라고 하는 양식 자체에 대해서조차 적대적인 청중의 싸늘한 반응을 보고, 결국 그는 무대를 버리기로 결심한다(1740. 2. 10). 그리하여 흥분 속에서 8월부터 9월에 걸쳐서 메시아, 10월에는 삼손 등 두 곡의 오라토리오의 작곡에 착수하는 한편, 윌리엄 카벤디쉬 William Cavendish의 초청을 받아 더블린으로 갔다. 이곳에서는 메시아가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1742. 4. 13). 8월 말 런던으로 돌아온 그는 오라토리오의 작곡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오라토리오의 막간에는 멋진 카덴짜를 붙여서 자작의 오르간 콘체르토를 연주했는데 이것을 포함해서 오라토리오의 상연은 거의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삼손(1743. 2), 세멜레(1744. 2), 요셉과 그 형제(1744. 3), 헤라클레스(1745. 1), 벨샤자르(1745. 3) 등이며, 어느 것이나 모두 최고 수준에 달하고 있는데 평가는 각양각색이었다. 이때 이래로 헨델은 가입제도상류계급 사람들을 우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성공한다고는 볼 수 없는를 없애고, 그 이후부터는 공개(公開)로 상연했다.
후기의 걸작
영국의 일반 대중이 그의 역경에 대한 용기를(1743년에 그는 다시 발작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코바이트당의 반란 때 그가 취한 충실함을 칭송함에 따라 헨델에게는 조금씩 유리한 변화가 일어났다. 작품에 대해서는 이론이 분분하긴 했지만 헨델은 차츰 국민적 영웅으로 추대되어 갔다. 그래서 그는 보다 수익률이 높은 작품을 개작하여 재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최후의 오라토리오(유다스 마카베[1747. 4], 알렉산더 발루스[1748. 3], 조슈아[1748], 솔로몬[1749. 3], 수잔나[1749. 2]의 평판은 더욱 높아졌으며, 엑스 라 샤펠의 화의(和議)를 축하하기 위하여 국왕이 의뢰한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으로 그의 명성은 마침내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테오도라(1750. 3)나 예프타(1752. 2)는 거기에 상응하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사실 사람들은 그의 고유한 정신적 향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공유하지도 못했다. 그 후 그의 작품은 영국이나 아일랜드뿐만 아니라 대륙에서도 종종 상연되고 연주되었지만, 그의 만년은 매우 쓸쓸한 것이었다. 이 위대한 시각적 예술가는 1753년 J. S. 바흐를 수술했던 경험이 있는 테일러를 포함한 두 사람의 유명한 외과의사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시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처음으로 쇠약해진 이후, 헨델은 다시 일을 시작하여 그 시대의 작품을 상세하게 검토하고, 편지를 구술하는가 하면 이미 작곡된 작품에 수정을 가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너무 쇠약해져 있었다. 그는 1759년 4월 6일 스미스 J. C. Smith의 지휘로 메시아를 연주할 때 청중 앞에 나타났는데 그것이 청중이 그를 본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처럼 성 금요일에 죽기를 원했다. 그리스도교도다운 그의 소망은 거의 이루어졌었다. 그는 1759년 4월 14일의 성 토요일에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4월 20일 3천여 명의 군중이 그가 잠들어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 모여 그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했다.
강력한 조직자
헨델의 표현방법은 장대하고 힘차며, 정열에 넘치고 격렬하며 단호하고 때로는 거칠거나 난폭했지만, 그 자신은 매우 선량하고 변함없는 고결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여 열심히 일했다. 그는 쉬지 않고 쳄발로 앞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 건반이 다 닳을 정도였다. 그는 단 하루(1737년의 크리스마스)의 휴식을 사이에 두고 파라몬도와 세르세를 작곡했으며, 사울을 완성시키고 난 사흘 후에는 이스라엘의 작곡에 착수했다. 작곡 템포가 무척 빠른 반면, 많은 부분을 삭제하는 편이었던 그는 테오도라를 5주만에, 메시아를 24일만에, 타메를라노를 20일만에 완성시켰다. 그는 다양성이라는 면에서도(그는 모든 분야에 진출했다), 정신성이라는 면에서도 매우 많은 걸작을 남겨 놓았다. 따라서 이들 대부분의 작품이 음악가나 평범한 비평가, 그리고 호기심이 조금도 없는 지휘자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하게 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시대의 음악어법을 사용한 헨델-바흐도 그러했다-은 혁명적이라기보다는 진보적이었다. 그러나 여러 나라에서 이 시대의 지적, 사회적 엘리트들과 친근한 교류를 가진 그는 유럽 예술의 강력한 조직자, 즉 뛰어난 총괄자가 되었다. 독일은 견고한 구상, 리듬의 명확함, 결코 사라지는 일이 없는 경건한 정신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이탈리아는 그의 선율 작가로서의 재능, 신랄함, 풍부한 창의, 귀족 취미, 색채와 음색에 대한 감각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로부터는 명확함과 우아함과 균형을, 영국에서는 버지널 악파의 시적 취미, 퍼셀의 자연스러움, 선법적인 애매함, 리듬의 대담함을 배웠다.
헨델은 다양한 문화의 결실이기는 하지만 나무랄 데 없는 직업인으로써 풍부한 창의력과 상상력으로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면서 끊임없이 개성을 지켜 나갔다. 그는 창의성이 풍부하고, 매우 고귀한 사고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창의력이 풍부하다는 것은, 그가 음악사상 최초로 오페라에 콘트라바순을 사용(타메를라노)하고 저음 성부를 그 정지상태에서 해방시킴으로써(op. 5), 순환형식이나 4중주(op. 5) 또는 교향곡(op. 6)의 형식을 예감했다는 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의 붓으로 살아온 최초의 작곡가인 그는 오페라를 심리극으로 만들었으며이 점에서 그가 코르네이유와 라신느의 숭배자였음을 알 수 있다어떤 사소한 악센트도 음악으로 표출한다는 그의 오페라상(像)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모든 것, 모든 사람들과 싸웠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하이든을, 그리고 특히 모짜르트를 예시(豫示)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도동기조차도 예지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오라토리오에 그때까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확산과 의의를 부여했다. 이처럼 그는 진보적인 사상의 소유자였으며 한편으로는 매우 귀족적이기도 했다. 그의 오페라나 오라토리오는 역사(줄리어스 시저, 타메를라노)나 문학(알치나, 오를란도), 성경(사울, 솔로몬, 벨샤자르)의 영웅을 다루고 있다. 헨델은 이런 거대한 인물들을, 그의 풍부한 창의력과 여유있는 해설에 의해서 유형이나 신화의 수준까지 이끌어 올릴 수 있었는데, 이들 위대한 인물들에 매료되었던 헨델은 실제로 이러한 인물을 대할 때 그 재능을 더욱 발휘했다. 그는 그러한 인물들이 보다 큰 힘의 희생이 되어 자기 자신이나 자기의 운명과 맞설 때 그들의 진실의 밑바닥을 탐색했던 것이다. 그들의 위대함은 헨델 자신의 위대함이기도 했다.
놀라운 정신의 향상
그런데 헨델은 후기의 오라토리오에서 정신적인 향상에 달하게 되며, 오만함(살 Sal), 질투(헤라클레스), 죽음보다도 강한 사랑(알렉산더 발루스), 문명의 종말(벨샤자르), 정치적, 종교적 관용(벨샤자르, 테오도라), 종교(메시아),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치(예프터) 등에 대한 심오한 명상으로 이끌려 간다. 이 마지막의 작품은 그의 음악적, 정신적 사상의 유서인데, 헨델은 최초의 가사(〈존재하는 것은 모두 옳다 What ever is, is right〉)와 최후의 가사(〈할렐루야! 아멘 Halleujah! Amen〉) 속에서 자기 자신의 신조를 표현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존재 이미지를 나타내고 독립, 정신의 자유, 신의 의사의 수용, 그리고 우주의 큰 법칙에 대한 복종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동시에 용기, 인간의 정열, 희망, 용기, 명석, 낙관주의의 힘을 체관(諦觀)에 대항시킴으로써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도전도 가르치고 있다. 이처럼 헨델은 르네상스 최후의 위대한 휴머니스트인 동시에 계몽시대의 대표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여기서 헨델에 대한 하이든의 헨델은 우리들 누구에게나 위대한 스승이다라는 최초의 평가나 생애의 마지막 무렵에 베토벤이 밝힌 지금까지 존재했던 최고의 작곡가다. 그의 무덤에 무릎을 꿇고 싶을 정도이다라는 고백, 리스트의 헨델은 세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위대하다는 단도직입적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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